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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 (해례본)

기회와희망 2023. 8. 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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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 (해례본)

등재 1997년

외국어표기 訓民正音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 해례본

본문

1446년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訓民正音) 판본에는 1443년 창제된 한글을 반포하는 조선 4대 왕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반포문이 담겨 있다. 또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해설과 용례를 덧붙여 쓴 해설서 해례본(解例本)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판본은 훈민정음해례본이라 불리며,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세계적 중요성, 독창성, 대체 불가능성

훈민정음은 한국인에게 문자 체계의 혁명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한자로는 쓸 수 없었던 한국인의 말까지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한자는 중국인을 위한 문자 체계로, 음운 체계와 문법 구조가 한국어와 전혀 달랐다. 이에 대해 정인지는 훈민정음해례본에서 "한자로 우리말을 쓴다는 것은 네모난 무늬를 둥근 구멍에 억지로 끼워 넣는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한국인이 한자로 말을 쓰기 위해서는 소리를 한자로 바꾸어 써야 했고, 이 때문에 의사소통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한자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이두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두는 조선시대 관료와 일반 백성들이 한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기록하는 문자 체계였다. 한자로 우리말을 순서대로 적고, 여기에 우리말의 조사와 어미까지 적었다. 그러나 이두는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말의 소리를 특징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사와 어미의 미묘한 차이를 반영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종대왕이 한국어의 음운 체계를 반영하는 문자를 창제했고, 이를 통해 한국인은 말을 온전히 문자로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혁신의 두 번째 측면은 한국인이 문자를 매우 쉽게 배우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는 각각의 개념을 나타내는 글자를 하나하나 외워야 했기 때문에 매우 어려웠다. 또한 글자의 그림이 복잡해 쓰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한자를 배우는 것이 한국인과 같은 외국인에게는 매우 어려웠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자를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고, 문자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는 28자에 불과하고 그림도 단순해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쉬웠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글을 배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국인은 독특한 민족 언어를 완벽하게 쓸 수 있게 되었고, 민족문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늘날 한국의 문맹률이 낮은 이유는 누구나 쉽게 글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는 유네스코의 문맹 퇴치 운동에 기여하고 있다. 게일(J.S. Gale,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겸 한국어학자)의 선언문에서 "세종대왕은 단순히 동양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기여한 왕이다. 위대한 일을 많이 했지만 한글(즉,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의 창제가 그중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사실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한글』,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 회보, IV권, 제1부, 1912년).

 

한국 정부는 양력으로 훈민정음해례본의 발간일을 계산해 10월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한 후, 1946년부터 매년 국가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한국인에게 중요한 책이다. 오늘날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상을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이 책이 세계 문화에 끼친 영향력을 보여준다.

문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글의 옛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글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설명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된 후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며, 28개의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음자에 속해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이며, 훈민정음은 1446년에 정식으로 반포되었고,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이 붙였다고 한다.

 

훈민정음은 보급 초기에는 정음(正音)'이라고도 불렸으며, 이외에도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 등으로 불리며, 상류층에 의해 외면당했다. 그러나 한자에 비해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 쉬워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 한국어를 표기하는 공식 문자가 되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나서 궁중에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훈민정음해례본은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한 권도 전해지지 않다가 1940년 경남 안동에서 약 500년 만에 발견되어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 원본 또는 오성제자고라고도 하는데, 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존에 알려진 예의편에 해례 편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예의 편은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려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해례 편은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이 처음 발견되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으로 책의 규격은 가로 20cm, 세로 32.3cm이다. 해례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예의, 해례, 정인지의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이 직접 쓴 예의 부분은 4장 7면으로 1면 7행에 1행 11자, 집현전 학자들이 쓴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1면 8행에 1행 13자, 정인지가 쓴 서문은 3장 6면에 1자씩을 내려 1행 12자로 구성돼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예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의 편은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을 밝힌 서문과 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한 예의로 구성되어 있다. 해례 부분에는 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을 설명한 제자해, 초성에 대해 설명한 초성해, 중성에 대한 설명과 중성자의 합용법을 제시한 중성해, 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한 종성해, 초성. 중성. 종성의 글자가 합쳐져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예를 제시하고, 중세어의 성조를 설명한 합자해, 단어의 표기 예시를 제시한 용자해로 구성되어 있다. 정인지의 서문 부분에는 한글의 창제 이유, 창제자, 한글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그리고 마지막에 '정통 11년(1446년) 9월 상한'이라는 반포일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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