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 화성
1997년 등재
영문명 Hwaseong Fortress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이다.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관청을 이전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어 목적으로 조성했으며, 1794년 2월에 착공해 2년 반의 공사를 거쳐 완성했다.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4~6m 높이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둘러싸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인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쳐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 축성기법에 동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 그 이전의 한국 성곽에서는 보기 드문 다양한 방어용 시설들이 많이 추가되었다는 점 등이 특징이다,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점 등이 특징이며, 1801년 발간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통해 공사의 자세한 경위를 알 수 있다.
등재기준
화성은 그 이전 시대에 조성된 한국의 성곽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화성은 기존 성곽의 문제점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여 포루, 공심돈 등 새로운 방어시설을 도입하고 이를 우리의 군사적 환경과 지형에 맞게 설치했다. 특히 이 시기에 발달한 실학사상은 화성 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학자들은 한국과 중국, 일본, 유럽의 성곽을 면밀히 연구하여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독특한 성곽 양식을 결정했다. 화성 축조에 사용된 새로운 장비와 재료의 발달은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화성은 분지로 구성된 부지를 둘러싸고 산마루에 축조된 기존 한국 성곽과 달리 평평하고 넓은 대지에 조성되었다. 전통적인 성곽 축조 기법을 계승하면서 군사, 행정, 상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도시 구조를 갖추고 있다. 화성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급속한 사회 변화,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완전성
성곽의 중요한 부분인 성벽과 4개의 성문, 그리고 각종 방어용 시설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어 군사시설과 주거지역으로서의 화성의 모습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 건물을 포함한 모든 유산 요소가 유산 경계 내에 있다.
진정성
화성은 축조 당시의 특성이 잘 남아 있어 높은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해를 포함해 부분적으로 훼손된 부분은 『화성성역의궤적』을 바탕으로 엄격한 고증을 바탕으로 전통적 기술과 재료를 사용해 복원했다.
역사적 배경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21대 왕인 영조의 차남으로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승지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겨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그 축성의 근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으로 인한 당파 정치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세워진 것이다. 또한 수도 남쪽의 방어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삼아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준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해 1796년 9월에 완공됐다. 축성 당시 거중기 녹로(도르래 기구) 등 건축을 위한 새로운 기계를 고안하여 큰 규모의 석재를 운반하고 쌓는 데 활용했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을 건설했으나 전란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축조 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으며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사라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대부분 축성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이며, 동쪽 지형은 평지를 형성하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 형태를 띠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곽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의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곽 2)이 소멸하고 4개 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 당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을 쌓은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孝)'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만 아니라 동원된 인원의 인적 사항, 자재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자재 가공법, 공사 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보존 및 관리 체계
화성의 전 영역과 팔달문, 화서문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경기도 문화재 보호 조례에 의해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그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축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또한 '수원시 세계문화유산 화성 운영 조례'는 화성 및 부속시설의 관람과 활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화성의 보존에 필요한 예산을 배정하고, 보수와 유지관리 및 주변 지역의 현상변경에 관한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이다. 수원시는 주기적으로 개정되는 지구단위계획을 통해 성곽 안팎의 건폐율, 용적률, 높이를 제한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문화재 현상 변경 처리기준을 준용하고 있다. 또한 30여 명의 직원이 배치된 수원시 화성사업소가 현장에서 유산을 관리하고 있으며, 유산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이뤄지고 있다.
수원시 조례에 따라 설립된 '수원화성운영재단'은 유산 관련 시설물 위탁관리, 관광 활성화, 수익사업 등을 담당하고 있다. 화성의 보존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화성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로 문화재 수리 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 문화재 수리 기술자가 담당한다. 화성의 보존에 있어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 건축물에 대한 화재 위험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 CCTV와 무인경비 장치를 설치하고 상황실을 운영하는 등 24시간 감시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잡초도 화성의 성벽을 해치는 요인으로, 이를 제거하기 위해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본문
수원 화성은 한국 건축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도시계획, 조경 및 관련 예술에도 수 세기 동안 큰 영향을 끼쳤다. 화성은 동아시아지역 군사 방호건축의 전형이며 군사 건축사의 역사적 표본이다. 수원화성은 군사, 정치, 상업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요새와 구별된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부당하게 단죄되어 처형당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1776년 영조의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골을 풍수적으로 가장 길지인 화산으로 이장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인근에 용주사를 세우고 조정을 수원 팔달산 기슭으로 옮겼다. 조정을 옮김으로써 정조는 당쟁을 종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며 새로운 성안에 있는 안전한 궁궐 안에 머물 수 있었다.
화성은 실학파의 중진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설계했다. 건축물은 전 영의정이자 형조판서였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감독하에 1794~1796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히 묘사된 거중기, 도르래를 비롯한 기타 특수한 건축 장비는 화성 건축을 위해 설계 및 제작되었다.
화성의 행궁과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비롯한 다양한 건축물이 요새 주변에 지어졌으나, 이 건물 중 일부는 이후 전쟁과 반란으로 화재로 소실되고 행궁의 부속 건물인 낙남헌만 현재까지 남아있다. 성의 일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으로 인해 화성을 원래의 정확한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한 성벽은 팔달산 기슭을 포함한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것은 규칙적이거나 대칭적인 형태가 아니라 땅의 지형에 따라 건축되었다. 성벽 주변에는 4개의 성문, 수문, 관측탑, 지휘소, 다연장포 발사대, 화기보루, 각진 탑, 비밀문, 초소탑, 보루와 벙커 등 원래 48개의 방어시설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각 총안 사이의 벽(merlon)에는 3개의 총안이 있다.
네 개의 성문은 중요한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의 팔달문과 북쪽의 장안문은 석재를 기본으로 한 2층 목조 건물로 측면에 경비병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고, 불에 구운 벽돌로 쌓은 반달 모양의 V자형 보루로 가려져 있다. 이 문들은 수원화성을 통과하는 주요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서쪽과 동쪽의 건물은 1층 건물로 한국전쟁 당시에도 V자형 보루에 의해 보호되었다.
1964년 성의 복원 및 재건 작업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진 탑, 지휘소, 관측탑, 보루 및 기타 방어시설은 모두 견고하게 지어졌으며, 효율을 극대화하고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변의 성벽, 성문, 탑, 보루 등의 기념물은 재료와 기술 면에서 진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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